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리코의 전투 (문단 편집) === 가톨릭의 설명과 반론 === >신명기를 저술한 ‘학파’에 속하면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최근(기원전 7-6세기)의 체험에 비추어 묵상하려는 편집자가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서, 그 때까지 형성된 여호수아기의 자료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묵상은, 이전 작품에 가한 수많은 손질 외에, 특히 1장과 23장에 나오는 긴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가나안 땅의 정복은 이제 일부 이스라엘인들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일로 제시된다(10, 28-39 참조).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요르단 동쪽 지파들이 계속 언급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일치가 위협받는 시대에 그것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다(1,12-16; 12,1-6; 13,8-32; 22,1-6 참조).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이스라엘에게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그분을 위하여 투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른 신들을 섬기는 민족들과 공존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충성이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다. 그래서 여호수아기에 이 충성에 관한 생생한 관심이 배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에 사는 민족들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곧 그들을 모두 “완전 봉헌물”로 바쳐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망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6,17.21; 11,12.14).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조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다.'''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피할 수 없었던 우상 숭배의 위험을 뼈 저리게 경험하고 난 뒤의 생각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에 투영시킨 것이다. >(중략) 반면에 예리고의 경우, 이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럽다. 예리고 함락을 이야기하는 6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이 이야기를 좀더 깊이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 복잡한 과정과 복합적 구성을 드러내는 이 6장이 예리고라는 성읍의 포위 공격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가 아님이 드러난다. 6장의 이야기는 일종의 ‘종교 의식’, ‘전쟁 전례’로 제시되는 것이다(6,2 각주 참조). 성서 본문이 우리가 제기하는 의문이나 질문에 항상 시원한 대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6170&bid=13000708|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경해설 中]]> >예리코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가나안 도시국가들을 정복할 때 쓴 전략을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본보기다. 예리고를 정복할 때 그 도시에는 성벽이 없었고 아마 이미 주민도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도시는 벌써 두 세기 전에 무너졌다. 아마도 예리고에서 거룩한 전쟁을 예절적으로 표상하고 거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때 전례적인 세부 사항(계약궤, 행렬, 사제들, 일곱날, 나팔소리)과 전사에 관한 세부 사항(계약궤, 전사들, 전쟁의 함성, 나팔소리)을 곁들였을 것이다. <성서해설 - 국제가톨릭성서공회 편찬> 가톨릭에선 후대의 저자 혹은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되어서 그렇게 쓰여졌으며, 이 전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인 설명이라고 본다. 성경에는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을 단기간에 모조리 밀어버린 뉘앙스로 나오지만, 역사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오랜기간 그곳 원주민과 공존한 것이 확실하다. 이 과정에서 우상숭배 등 원주민들의 영향이 나타났고, 후대의 히브리인 편집자는 '그때 원주민 놈들 전멸시켰으면 우린 오염되지 않았을 텐데 ㅜㅜ'라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 역시 흡사 나치삘이 나는 병맛 논리아다. 또 기원전 사람들의 현대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논리가 반영되어 있지만, 성경에 고대인의 사상이나 도덕 등이 반영된다는 것이 가톨릭에서 성경의 권위가 죽는 것도 아니다.(고 신앙인은 믿는다.) 여기서 신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많은 것을 주려고 하신다."이지, 누구누구를 죽여라 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수아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역시 신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죽여도 되는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성경은 당대인의 사상을 감안하고, 경전이 본래 하고자 하는 말을 파악하며 읽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만들어진 책이지만, 그것이 문자 하나하나가 참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태도는 '예리코의 전투'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태도이다. 이런 것들을 감안하지 않고 성경을 읽을 경우 자칫 근본주의 성향을 가지거나 성경의 참 뜻과는 10000광년쯤 멀어진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라는 구절은 배금주의를 경계하라는 뜻으로 해석될지언정 말 그대로 천국가려면 돈을 다 내다버리라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는다.이 구절을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부의 추구를 인정했던 존 칼뱅과 그의 주장을 따르는 장로파는 이단중의 상이단이 되어버리고 유럽인들과 북미인들은 거의 다 지옥행 확정이다. 심지어 이 구절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이나 문화 같은게 성경에 반영되었다는 걸 너희들은 인정하지? 그러면 성경은 물론이고, 기독교의 신은 성서 저자에게 시대를 초월해서 성서를 쓰게 하지 못했으므로 권위가 없는 거 아니냐?"라는 식의 비아냥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성서무오설과 오히려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이나 문화 같은게 성경에 반영되었다는걸 인정하면, 성경의 권위가 추락한다."고 주장한다. 단지 "그러니까 기독교는 사기"와 "그러니까 성경은 100% 무오함"이라는 결과만이 다르게 나왔을 뿐이다. 비록 설정 놀음에 불과해 보이고,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설명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톨릭은 내부적으로 비록 고대인들의 사상이나 문화가 반영되었지만, 성경의 권위를 믿는 자체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다. 즉 가톨릭에서도 주장하지 않는, 오히려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서무오설이 가톨릭을 비난하는 근거가 된다면, 가톨릭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논란]] 항목의 4중적 해석법 단락을 보면 알겠지만, 대체 어느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어느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지의 기준이 없다. 가톨릭은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 같은 사건 말고는 성서에 나오는 것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마인드를 전제로 깔고 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유목민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인정하지만 해석하는 이들의 비교적 현대의 기준으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과 동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레토릭과 팩트는 나누는 준거점이 '신앙을 옹호하고 싶다.'는 욕구에 있다. 욕구를 위해 논증을 왜곡하는 케이스에 가깝다. 이는 결국 그 기준을 정하는 교단 내부의 주장이 외부에서 보았을 때 어떤 명확한 근거가 있어보이진 않게 된다. 예수가 얼마 안되는 빵과 물고기로 장정 수백 명을 먹여살리지 못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후에 부활한 건 사실이며 예리코 전투는 비유지만 성모 발현과 같은 기적은 현실로 인정된다. 이런 기준에는 신은 시대를 초월한 도덕적인 존재라는 기본 바탕이 깔려있을지는 몰라도 그 신을 구사하고 있는 성경에 나와있는 몇몇 내용은 분명히 이런 기준에 반하고 있다. 결국 성경의 일부 부분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게 되는데 부정하는 부분과 긍정하는 부분의 기준은 '신은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신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야만 이런 해석법이 타당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어느 정도 결론을 내놓은 다음의 해석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시각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의 내용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성서무오설과 다름없는 근본주의적인 행태라는 것은 다소 핀트가 엇나간 비판이다. 이 둘은 '성서 텍스트의 사실성'이라는 문제의식 말고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역사적 , 과학적, 경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권위는 보장될 수 있는가?'하는 입장이다. 반면 성서무오설은 '그러니까 아무튼 전부 맞자고 하자.'는 소리다. 이 둘을 같은 범주로 역는 건 의도적 오독에 가깝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잘못한 것을 왜 가톨릭에게 책임을 묻느냐'라는 명제는 전형적인 '섀도복싱'이다. 여기에 대한 가톨릭의 해석은 결국 신앙이 있고 나서의 해석일 뿐이며,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성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위에서 보듯 죽어 마땅했다와 같이 여러가지 이유를 따로 덧붙인다. 그러나 결국 이런 논리들도 그들의 내부 논리와 신념을 받아들인 다음에야 현대의 도덕 기준과의 괴리를 신앙심으로 메꿀 수 있도록 만들 뿐이다. 그런 성서무오론자, 그런 근본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 성경의 내용이 다소 괴악하더라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해주기 위해서 가톨릭의 내부 논리를 받아들여야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믿지 말 것을 강요하면 안되고 신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기 때문에 내부의 논리가 있다면 그 도덕성을 제대로 평가해줘야 하지만 기독교의 교의에 대해서 의문을 표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진지하게 믿는 신자들이 제우스를 절조없는 바람둥이 신으로 받아들인다면 신화를 신화 그대로 믿는 근본주의 광신도들, -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을 만들기 위해서 간음을 한다고 주장하며 제우스가 변장했을 지도 모르는 동물들과의 수간을 권장하는 - 의 행태와 결론만 다를 뿐이라며 신화 무오설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리고 제우스가 괴물들을 무찌르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오와 간음했다는 부분은 신의 것을 함부로 탐해선 안된다는 교훈담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말이 안 된다. 그 말을 듣는 것이 애초에 그 신화를 진지하게 신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단순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독자라면 애초에 먹히지 않을 주장이다. 결국 이런 면은 성경의 명확한 한계라고 볼 수도 있고 가톨릭을 믿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위의 해석에 반박을 하자면 기본적으로 다른 해석 - 아마도 신은 선하지 않거나 성경은 다소 한계점이 있다 - 도 가능하다 정도일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